도면 한 장 들고 주방 설비 업체와 씨름했던 기억

도면 한 장 들고 주방 설비 업체와 씨름했던 기억

종이 한 장에 담긴 식당의 현실

처음 식당 인테리어를 계획할 때만 해도 모든 게 간단할 줄 알았다. 그저 예쁜 의자를 고르고, 벽지 색깔을 정하고, 주방 위치만 잡으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막상 주방 설비 업체 미팅을 나가보니 상황은 전혀 달랐다. 업체 사장님은 내 손에 쥐어진 허접한 도면을 보더니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 도면대로라면 냉장고 문이 열리다가 뒤에 있는 조리대랑 부딪힐 텐데, 동선 계산은 하신 건가요?” 그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그저 예쁜 주방만 생각했지, 조리하는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솥단지를 어디에 놓아야 가장 효율적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2D 도면 위에서 점선으로 표시된 가구들이 실물로 치환되는 순간 벌어질 아수라장이 눈에 선해지기 시작했다.

3D 도면이 주는 거짓된 안도감

조금이라도 실수를 줄여보겠다고 3D 도면까지 의뢰했다.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입체적으로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략 150만 원 정도가 추가로 들었던 것 같다. 결과물은 화려했다. 조명까지 예쁘게 입혀진 가상 공간 속의 식당은 당장이라도 장사를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3D 도면으로 확인한 주방의 타일 색과 실제 주방기구 업체에서 가져온 스테인리스 조리대의 질감이 너무 따로 놀았다. 3D는 현실을 아름답게 왜곡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사무실 디자인을 고민할 때도 비슷했다. 책상 배치는 훌륭해 보였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콘센트 위치가 책상 다리에 가려져 애를 먹는 일이 발생했다. 설계 단계에서 콘센트 위치 하나하나를 확인하지 않은 나의 불찰이었다.

현장에서 마주한 도면과의 괴리

현장에 들어간 첫날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공사 기간은 대략 한 달 정도로 잡았는데, 주방 설비가 들어오는 날 도면과 실제 가스관 위치가 20cm 정도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설비 기사님은 혀를 차며 “도면은 도면일 뿐, 현장은 현장”이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기셨다. 가스관을 다시 옮기는 비용만 50만 원이 추가로 들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주방의 퇴식구 위치를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옮기면 효율적일 것 같아서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위치를 바꿨는데, 나중에 배수구 구배를 맞추느라 전체 바닥 공사를 다시 할 뻔했다. 그때의 그 당혹감이란. 도면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현장에서 마음대로 바꾸는 것도 엄청난 모험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시간이 지나서야 보이는 것들

결국 공사를 마치고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한 지 반년이 넘었다.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주방 통로는 훨씬 좁아졌고, 조명은 생각보다 어두워서 추가로 레일 등을 달아야 했다. 손님들이 나가는 길에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 설치했던 가벽은 지금은 오히려 짐만 되는 것 같아 철거를 고민 중이다. 도면을 그릴 때는 몰랐다. 그 좁은 선 하나가 나중에는 사람 한 명의 이동 경로를 막는 거대한 벽이 될 줄은. 사실 요즘도 가끔 손님이 없을 때 식당 구석에 앉아 천장을 본다. 배관들이 지나가는 모양을 보며 ‘저걸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틀었더라면 주방이 더 넓었을 텐데’ 하는 미련이 남는다. 완벽한 도면은 세상에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았던 건지 잘 모르겠다. 오늘도 깍두기 통을 나르며 좁아진 동선 탓에 어깨를 한 번 부딪히고 나니, 처음 도면을 그렸던 그날의 내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아마 다음에 또 이런 일을 하게 된다면, 도면 위에 선을 그리기 전에 직접 현장에서 몸으로 동선을 그려보는 시간을 훨씬 더 많이 가져야 할 것 같다.

댓글 1
  • 3D 도면 덕분에 처음에는 좀 덜 당황했는데, 그래도 결국 현실과의 괴리는 결국 컸네요. 마치 사진 속 멋진 풍경과 실제 산이 너무 다른 것처럼요.